임영방(전 한국국립현대미술관 관장) - 견고한 형태로 표현된 조화 속의 운동 -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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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3-12-22 16:13 조회 850hit 댓글 0comment본문
견고한 형태로 표현된 조화 속의 운동
글: 임영방 (미학,미술사)
1. 견고한 형태와 수평, 수직의 구축적인 구조로 이루어진 임동락의 작품에서 일차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조형적인 특징으로서는 시각적인 부담을 주지 않는 알맞은 규모의 덩어리가 제공해 주는 안정감과 더불어 그러한 안정된 형태 속에서 이루어지는 운동감이 불러 일으키는 시각적 긴장을 들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외관상 인류 문명의 상징인 스톤헨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뉴멘탈리티를 느끼게 만들 만큼 상당한 중량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대한 돌덩어리에서 느끼게 되는 위압적인 분위기로서가 아니라 매우 친숙한 것으로 다가온다. 그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이러한 친화력은 돌을 단지 물리적 재료로 파악하지 않고 그속에 인간의 역사와 문명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비전을 표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무한성을 측정하기 위해 기울인 인간의 노력의 흔적으로 거석문화 유적은 태양을 숭배하던 선사시대 인간들의 주술적 사고방식에 대해 돌이켜 보도록 만들지만 임동락의 작품은 그것을 현대적인 조형언어로 새롭게 해석해내고 있어 주목된다.
둥근 원반에 의해 지지되는 돌기둥으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이 지닌 안정된 형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해시계 같기도 하고 혹은 과거 어느 시대에 축조되었을 법한 신전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의 작품이 대체로 돌이란 조각의 전통적인 재료를 사용하고 있으나, 한 덩어리의 돌로부터 형태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돌을 서로 결합시키고 있는 방식을 통해 건축적 구성까지 떠올리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해시계나 거석문화 유적 신전을 연상케 만드는 그의 작품은 일단 형태적인 완결성이 돋보인다. 게다가 그가 삼차원적 입체 속에 시간성의 문제까지 결합시킴으로써 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작품이 다르게 보이고 느껴지도록 고려한 점이 그의 작품을 특이하게 만드는 요인인 것이다. 게다가 그의 작품은 조각 작품에서 일반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내적으로 응충하는 형태로서가 아니라 외부세계로 향한 개방성을 지니고 있어 실내전시용 조각과는 다른 맥락의 환경조각으로의 지향성을 보여준다.
그 자신이 밝힌 바대로 내용적으로 볼 때 이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의 과학정신과 인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즉, 잘 조직된 형태로 구성된 이 작품은 자연을 극복하고 그것을 인간의 삶을 위해 활용하고자 한 과학적 노력의 결과에 대한 그 자신의 관심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연을 단지 인간을 위해 사용하는 대상, 정복해야 할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그 속에 내제해 있는 질서와 조화의 아름다움을 작업을 통해 구현하려고 한다.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진 수평과 수직, 안정성과 운동감, 돌출과 함몰 등이 대립적인 요소의 변화하는 자연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법칙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 이 대조적 요소들은 상호대결의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조화와 균형의 원리에 대해 공존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이 대부분 자연사계의 상징인 산(山)을 대상으로 산의 외형과 그 내부에 깃들어 있는 조화와 질서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각으로 상승하는 직선은 끊임없이 수직적 팽창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 직선을 감싸고 있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곡선은 기산의 연속성에 의해 마모되고 궁극적으로 다른 대상들과 융화하는 자연의 법칙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 특히 수평으로 깔린 원반은 그 자체로서 환경조각이 갖추어야 항 주변 환경과의 조화에 썩 잘 어울리는 형태이기도 하면서 대립보다 상생(相生)을 지향하는 우리 자연관과 조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수직적으로 상승하는 돌기둥의 운동감은 성장을 의미하며, 그것을 지지해 주는 것으로서 둥근 바탕은 인류문화의 기반인 전통과 역사의 깊은 뿌리를 암시한다. 이를테면 「POINT-뜨거운 태양」이란 다소 문학적인 제목을 가진 작품을 주목해 보자.
네 개의 돌기둥은 동, 서, 남, 북 사방위(四方位)를 의미하는 만큼 대지 위에 직립해 있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방향과 거리, 그리고 우주의 넓이를 파악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의 시점을 암시한다. 전통적으로 한국인을 포함하여 동양인들은 사방위를 통해 음양오행이나 우주의 질서에 대해 통찰해 왔다.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원반은 인간이 발을 딛고 있는 땅을 의미한다. 서구인들이 건축물의 원개(圓蓋:쿠폴라)를 통해 천체를 표현하고자 했다면 그가 파악하고 있는 우주의 중심은 바로 자신이 딛고 있는 이 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심점에 마치 핵(核)과 같은 난형(卵形)의 완전무결한 형태를 위치시킴으로써 그는 사물과 세계를 파악하는 하나의 출발점, 즉 회화에서 원근법이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모든 대상들이 수렴하듯이 그의 조각적 구조가 이 난형을 향해 수렴하도록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구형은 원반형의 받침과 기둥들이 마치 알을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도록 만들고 있다.
일면 매울 복합적인 작품의 형체는 그러나 수다스럽지 않고 정통적인 조각의 조형언어를 충실히 따르고 있어 심리적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의 작품이 우리의 시각적 비교에 익숙하게 읽혀지는 이유도 그가 추구하는 방법이 조각의 ‘표현의 전통’을 따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돌을 다루는 기술이나 그것을 조각적으로 처리하는 방법, 또 그런 바탕 위에 이루어지는 조형적 질서가 결코 낯설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서로 다른 재료의 결합 역시 생경하다기보다 그의 의도를 부각시키는데 적절한 선택인 것처럼 보인다.
자연과 세계에 대한 그의 독특한 감각과 비전은 비단 이 작품 속에서 뿐만 아니라 산을 대상으로 다룬 작품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가 표현하는 산의 형태는 완만하게 융기하며 포물선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강하고 분명한 직선에 의해 마치 칼로 도려낸 듯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구릉과 계곡을 암시하는 평행선이 등고선처럼 중첩되고 있으며 복잡한 산세(山勢) 또한 평면화 시킴으로써 산의 이미지를 형상화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어떤 방식으로 성취되고 있는지를 파악하게 만든다.
즉 그는 산을 단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으로만 표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적 구조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산이란 대상의 물리적 외양은 단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인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형태만을 갖추고 있다. 즉, 산의 기본 골격, 그 구조가 작품의 출발점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조각 작품에서 두드러진 이러한 표현방식은 초기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관심을 물건 그 자체가 하나의 완성이자 궁극적인 귀결점인 좌대 위에 안치되는 작품으로서의 조각으로 만족하지 않고 환경과 조화를 요구하는 개방적인 공간감과 더불어 결국에는 대중과의 소통을 지향하는 야외조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대개 야외조각의 경우,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위해 일정한 규모의 크기와 가혹한 자연환경의 변화에 버틸 수 있는 적절한 재료의 선택, 그리고 무엇보다 작품이 놓일 장소의 특성과 조건에 대한 확고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야외조각이 갖추어야 할 몇 가지 조건을 구비하고 있어 조각영역의 확장이란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것임에 분명하다. 특히 그가 표현 하고자 하는 내용이 전혀 낯설지 않는 우리의 자연인 만큼 작품의 설득력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그가 추구하는 조형언어 역시 비교적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어서 작품에 대한 우리의 접근을 용이하게 만든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재료 및 기법, 표현방식의 익숙함이 작품의 내용적 견고성, 주제의 선명한 부각을 가로막는 장애가 될 수 있음도 유의하여야겠다. 자칫 형태의 아름다움과 기술적 완결성에 탐닉하다 보면 조각의 예술적 힘을 상실하기 쉽다. 다른 조각가들과 마찬가지로 임동락 역시 이런 한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 같지는 않다.
명쾌한 형태와 균형잡힌 구조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은 물건으로서의 심미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으나 그것에 집착하면 작품의 주제가 증발해 버릴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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